[논평]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노사정위원회 9.13 합의에 부쳐 –

노사정위원회가 재가동된 지 18일 만에 노사정 합의의 초안을 내놓았다. 정부와 여당은 이번 합의를 두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대타협’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은 대타협이 논의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누군가의 수식어 마냥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비참함에 사로잡힌 일터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왔으며, ‘노동개혁’ 논쟁의 결과가 자신의 삶에 더 큰 시련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을 지금,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 모두가 청년일자리 문제의 해결을 말하며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그 내용들은 청년·노동약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너무도 크게 괴리되어 있었다. 

첫 직장을 1년 미만 계약직으로 입사하는 청년층의 비중은 5년 사이 두 배가 넘게 늘었다. 인턴·수습·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이라도 안정된 삶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청년들의 절박함을 악용하는 희망고문은 너무도 만연하여 사례를 들기도 우습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기업들이 해고를 감행할 때 언제는 정당한 요건을 갖추었던가. 상사의 비위를 거스르는 사람을 찍어내는 데에 특별한 노력은 필요치 않다. 

“당신은 사회생활을 못한다. 성과를 내지 못 한다. 동료관계가 원만치 않다. 근무 태도가 불량하다. 우리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 당신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

전체 노동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변부 노동자에게 고용불안은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상이고, 우리의 노동은 유연해지다 못해 흡사 연체동물의 형상을 갖추었다. 현 시점에서 노사정이 합의한 바대로 일반해고 요건마저 완화된다면 노동약자들을 향하는 고통의 무게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기업조직의 운영에서 노동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합리성과 공정성은 무너진 지 오래이다. 취업규칙이니 근로기준법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종이에 적혀 있는 ‘좋은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부 노동자의 대다수는 사업장 내에 의무적으로 비치되어 있다는 취업규칙의 내용을 들여다 본 적도 없다. 청년유니온의 한 조합원은 회사 매니저에게 취업규칙을 보여 달라 요구했다가 하루아침에 해고통지를 받았다. 

근로기준법은 또 어떠한가. 오늘날 임금체불은 일부 아르바이트 사업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기업에서 ‘야근 수당 없는 야근’,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열정페이’가 넘쳐 난다. 노동법의 경계에서 은밀하게 강요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들은 허술한 근로감독을 보란 듯이 피해 다닌다. 우리는 일터에서의 법과 원칙, 노동기본권이 무력화되고 ‘사장 마음대로’가 관철되는 갑질의 질서가 이번 대타협을 계기로 강화될 것이라 크게 우려한다.

위와 같은 현실에서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에서의 보람과 성취는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조직의 부속품으로, 쓰다 버려지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청년실업 또한 이와 같은 비참한 노동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보려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이다. 그것은 사회 대다수를 절망과 박탈로 내모는 일자리 생존 경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나보려 하는 젊은이들의 발버둥이다.

거듭 강조한다. 지금 필요한 개혁의 우선과제는 고용의 ‘양’이 아니라 ‘질’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력난에 허덕이며 젊은이들 눈이 너무 높다 호소하는 대다수 중소기업들이 적정한 임금과 안정성 , 인간다운 성취와 보람으로 구성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혁의 본질이다. 불평등의 끝자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삶에 정의로운 분배의 결과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혁의 본질이다. 무법지대와 일상의 폭력에 내몰린 이들의 삶에 법과 원칙이라는 안전지대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개혁의 본질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공정한 협력을 조직해야 할 정부는 일방통행을 반복했고, 노·사는 임금피크제와 사내유보금이 각각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며 숫자 경쟁에 집중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물었지만, 그 책임의 결과가 약자의 삶에 정의롭게 흐를 수 있는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노사정위원회 결과를 두고 ‘청년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역사적 대타협’이라 규정한 정부와 여당에 묻는다. 언제까지 ‘청년’이라는 이름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가져다가 소비하기를 반복할 것인가. 언제까지 ‘청년’이라는 이름을 세대 간 갈등, 사회 갈등의 마중물로 부을 것인가. 문제해결의 의지도 역량도 없는, 반칙과 특권이 일상화된 집권세력이 청년 타령을 거듭하는 것은,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로 하여금 서로 더 많이 혐오하고 더 많이 갈등하라는 기대가 담겨있으리라. 

집권세력의 기대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데에 너무도 관대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분명하게 직시할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닮은 누군가의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는 따뜻함과 부당함에 분노하는 정의로움에서부터 진정한 변화를 다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갈등하기보다 협력함으로써 이 사회에 필요한 ‘평등’과 ‘공정’의 원칙들을 하나씩 바로 세워 나갈 것이다. 오늘도 땀흘려 일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2015년 9월 14일


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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